인구는 57만 4856명
주로 윈난성(雲南省) 누강(怒江) 리쑤족자치주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며 소수는 부근의 주·현과 쓰촨성(四川省) 얀위엔(鹽源), 얀삐안(鹽邊), 무리(木里)에 분산해 거주하고 있다.
리쑤어는 한·티벳어계, 티벳·미얀마어파, 이어에 속한다. 이들에게는 3종류의 문자가 있었는데 구미의 선교사가 만든 표음문자, 웨이시현(維西縣)의 리쑤인이 만든 음절 문자, 신중국 성립후에 만든 로마자와 같은 새로운 문자이다. 이것은 지금 리쑤족 사이에 보급되고 있다.
리쑤족은 이전부터 원시 종교를 신봉 했으나 20 세기 초, 구미의 선교사가 들어 오고 나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기독교와 카톨릭을 신봉하게 되었다.
리쑤족은 이족(?族), 나시족(納西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唐)나라 시대의 우만(烏蠻)을 뿌리로 두고있다. 8 세기 무렵 리쑤족의 조상은 진샤강(金沙江)의 양안 일대에 거주했다. 16 세기의 중엽, 약탈과 억압,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많은 리쑤족들이 부락장의 인솔아래 누강 지역으로 이주했다. 리쑤족은 높은 산 속에서 살아 생산력 수준이 낮고 화전 농법이나 수렵 등 원시적인 생산 활동을 주로 했었다.
리쑤족의 주식은 환경의 원인으로 인해 자연히 가장 쉽게 농사지을 수 있는 옥수수와 감자이다. 옥수수로 죽을 많이 끓여 먹는데 옥수수로 먼저 술을 담그고 난 후에 걸러진 것으로 끓여 먹기도 한다.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소나 돼지 등을 길러 잡아먹는 일은 많지 않지만 때로 산속에서 산짐승들을 잡아 양식을 대신하기도 한다.'리쑤(LiSu)'족은 술 마시기를 즐기는 민족으로 '니즈(nizhi)'라고 부르는 곡주를 담가 마신다. 그리고 이 '리즈'는 손님접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손님이 방문했을 때 주인은 손님에게 '리즈'를 대접한다. 만약 손님을 접대할 때 '리즈'를 대접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손님은 이를 꼭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인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리쑤'족은 또한 담배를 즐겨 피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를 즐겨 피우는데, 그 주된 이유는 방목을 할 때 풀밭에 많은 물것(모기같은 곤충)들이 있어서 연기를 피워 물리지 않으려고 하던 것이 담배를 피우는 습관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산 속에서 사는 것이 힘들고 단조로와 재미로 피우던 것이 이제는 뗄 수 없는 생활의 일부분으로 변했다고 한다.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마약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리쑤족은 사는 지역이 광범위하고 지형과 기후의 차이가 커서 가옥의 구조도 많이 다르고, 인근에 다른 민족들이 있을 때에는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전통가옥이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누쟝(怒江)지역의 '푸꽁(福貢)현 등에 있는 가옥들은 돌담초가집이거나 벽면을 대나무로 엮고 지붕을 초가로 한 집들이다.그리고 2층으로 건축하여 아래층에는 가축들을 기르고 윗층에는 사람들이 거주한다. 내부구조는 방을 2 또는 3으로 하든 거실을 꼭 만들고, 주방이 때로는 거실과 함께 있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햇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소가족제도를 취한다. 부모와 함께 사는 자녀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이다.
모든 자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분가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이고, 막내가 결혼하여 부모와 함께 생활한다.
그리고 유산을 물려주더라도 막내가 물려받는 제도가 시행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리쑤족의 결혼제도와 관계가 깊다. 봉건주의 사회제도하에서 리쑤족의 성생활은 무질서 한 편이었다. 결혼 전에 '공동의 방'이라는 곳에 모여 연애를 하는데, 무질서한 성생활로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는 것이 별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더라도 첫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인 경우들이 많았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자신의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막내와 함께 살고, 막내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제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리쑤족도 부자연명제(할아버지의 이름 끝 자를 아버지의 이름 첫 자로, 아버지의 이름 끝 자를 아들의 이름 첫 자로 사용하는 제도)가 있다. 이름은 남자아이일 경우 생후 7일만에 여자아이일 경우 생후 9일만에 이름을 짓는다.
현재는 기본상 일부일처제를 택하고 연애결혼이 많아졌으나 이전의 결혼 풍습은 여러 가지가 있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런 모습들이 남아 있다.
1. 매매혼
신랑이 신부의 집에 예물(소 또는 이에 상응하는 가치있는 예물)을 보내고 사오는 형태를 취한다.
2. 동혼(童婚)
어려서 부모들이 짝을 지워놓는 것을 말하는데, 심지어는 출생하기 전의 아이도 짝을 지우는 경우가 있었다.
3. 약탈혼
힘이 있는 자가 신부를 빼앗아 오거나 훔쳐다가 결혼을 하기도 한다.
4. 연애결혼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연애결혼이 점차로 늘고 있는데, 이전에는 연애결혼이 성사되지 못할 경우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도망을 가서 다른 지역에서 살기도 했다.
결혼식은 여자의 친척이나 친구가 여자를 업어서 남자의 집에까지 온다. 남자집의 문앞에 다다르면 남자측에서 이미 준비해놓은 술좌석에서 여자의 일행들에게 술을 대접하면서 동시에 환영가를 부른다.
여자측에서는 술을 받아 마신 후 다시 노래로 화답한다.이 환영 노래가 끝나면 정식 결혼식이 시작된다. 신랑신부가 한자리에 같이 앉게 되면 중매인이나 노인이 먼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축사를 한다. 그리고 모두들 함께 식사를 함으로 결혼식이 끝나게 된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나 리쑤족은 장례의식을 매우 엄숙하게 진행한다. 이들은 사람이 비록 죽었지만 육체만 죽은 것이지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례법은 매장과 화장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노인이 죽으면 모든 마을이 2~3일 동안 일을 중지하고 함께 죽음을 애도한다. 마을사람들이 상가에 올 때에는 자신들이 먹을 것을 갖고 오는 것은 물론 장례의 일체를 함께 힘을 모아 돕는다.
시체를 집안에 두는 시간은 이틀정도이며 머리를 높은 곳으로 하여 '훠탕(火塘)'안쪽에 둔다. 머리맡에 술과 밥과 고기를 놓고 제사를 지낸 후 제사(祭師)를 청해 활을 세 번 쏜다. 그 의미는 죽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연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를 집에 둔 시간 동안에는 하루에 세 번씩 밥과 고기와 물을 죽은 자에게 준다.
매장은 자기들의 습관에 따라 좋은 날을 잡아서 하는데, 출상할 때 두 청년이 앞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길을 개척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가다가 중간에 돌아온다.무덤은 장방형으로 파서 만들고, 시체를 안장하고 나면 다시 그곳에서 제사를 지낸 후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다.
본래 리쑤족의 신앙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종교이다.신중에서도 '미쓰(米斯; 하늘신)가 가장 큰 신으로 모든 우주만물과 신들까지도 다스린다고 믿는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물론 인간의 삶과 환경의 변화까지도 철저하게 '미쓰(米斯)'의 손에 달려 있으며, 인간은 영원히 그 힘과 지배를 거절할 수 없는 존재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운남성에 있는 다른 민족보다 조금 늦게 1913년에 처음으로 리쑤족에게 복음이 전해졌는데, 윈난성에 있는 민족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활발하게 성장했고, 민족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구약 성경도 완전히 번역되어 있고, 민족언어로 된 찬송가도 있다.
리수족의 기독교
리쑤족에게는 윈난성에 있는 다른 민족보다 조금 늦은 1913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졌는데, 기독교가 가장 활발하게 성장했고, 민족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구약 성경도 완전히 번역되어 있고, 민족언어로 된 찬송가도 있다.
리쑤족은 1840년 이후 외국의 식민지로 지내온 시간이 많았는데, 영국이 아편전쟁이후에 <남경조약>을 수립한후 인도와 미얀마를 거쳐서 이곳으로 들어왔고, 프랑스는 광서(廣西)지역을 통해서 운남지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주로 전교사(傳敎士-지금의 선교사를 당시에는 전교사라고 불렀다.
프랑스는 천주교를 전하기 위한 전교사를 많이 보냈는데, 그 결과 지금 운남성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를 먼저 보내고 그 다음에 군대와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기독교와 천주교가 침략자의 앞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중국에서는 용감한 리쑤족이 변경지역에서 이들 침략세력에 대항해서 국가를 지켰고, 후에는 중국정부가 이 지역에 가서 이들을 외세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한다.
1988년 8월 4일, 누쟝(怒江)주에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협회가 성립되었고, 모든 현에도 하부조직이 들어서게 되었다.
1989년 12월, 통계에 의하면 개방된 교회가 21,441곳이고, 목사 4명, 전도인 290명, 장로 37명, 관리인 545명, 예배장 535명이었으며, 1994년 3월 신자의 통계는 84,345명으로 되어있다.현재 리쑤족을 위한 성경학교는 리우쿠(六庫)등 4곳으로 어떤 곳에서는 다른 민족도 함께 공부하기도 한다.
리쑤족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10가지 강령을 철저히 지킨다. 10가지 강령을 정할 때 그 내용은 아마도 그들의 전통문화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지역에 따른 차이가 조금 있다.기독교의 이러한 강령으로 인해 신자들뿐만 아니라 리쑤족 사회가 경제적으로 좋아지며 위생환경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 강령들을 대체로 알고 따라 지킨다.
기독교의 활동과 영향
노래지도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청년들에게 찬송가를 가르쳐주며 화음(4부)을 가르쳐주어서 많은 젊은이들이 노래를 배우고 부르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 낮에 들에서 일한 후에 저녁에는 교회에 모여서 노래하는 것이
이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문화활동이요 낙이었다.
이들은 지금도 예배시간에 사회자가 부를 찬송의 4부 첫음을 잡아주면 아무 반주가 없어도 4부로 부르는데 참 아름답게 잘 부른다.
문맹퇴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리쑤'문자을 가르쳐 주는 공부반도 있었고, 당시에 학교가 마땅히 세워지지 못했는데, 교회가 학교의 역할을 해서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통해 신학문을 익히고 발전하게 되었다.
결 혼
매매혼을 금지시키고,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게 하였다. 한편 신자들은 불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하여 일부 젊은이들은 이로 인해 교회를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소송문제해결
신자들간의 문제는 법정에 가기 전에 교회 안에서 먼저 해결을 하도록 하여 문제들이 크게 비화하지 않고 잘 해결되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들은 교회를 거쳐서 지방정부의 법정으로 가도록 하였다.
교제활동
신자들은 교회에서 비신자들과의 결혼만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교제활동까지 규제하여 마을에서 결혼이 있거나 상이 나거나, 아니면 집을 새로 지어도 비신자들의 일일 경우 신자들은 그리 협조하지 않음으로 교회를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결국은 사회를 두 무리로 구분짓는 일이 된 것이다.
문 화
교회는 성결을 강조하여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교회에서 배우는 노래들 외에는 부르지 못하게 했다.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으로서 보존해왔던 전통문화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는데, 교회에서는 상벌규정을 만들어서 찬송만 하도록 강조했다. 이렇게 되어 신자와 비신자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민족전통문화가 점차로 없어져 가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제사금지
당시에 제사는 필수였고, 제사 때마다 짐승을 잡아야 했는데,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교회가 제사를 금하자 이 문제로 인해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일년에 몇 차례씩이나 지내야 되는 제사가 없어지자 살림이 많이 윤택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병이 나도 무당을 불러다가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교회에서는 목회자들이 기도해주어 병도 낫고 돈도 안들고 하자 이로 인해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마을 전체의 생활수준이 향상되게 되었다.
교파분쟁
누쟝(怒江)지역에는 4개 교파가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좋은 열심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였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교회세력확장을 위해 전도지역을 놓고 다투다가 결국은 지역을 구분해서 선교하기로 결정을 하고 지역을 크게 4등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던 교회가 자기들끼리 다투는 것을 보고 교회를 비난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으며 교회 안에서도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부정적인 영향
지나치게 성속을 구별하는 입장에서 신자와 비신자 사이의 거리를 너무 멀게 해놓았다는 것과 전통문화를 완전히 무시하여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강한 반감을 자아냈다는 것이다. 또 있다면 지나친 의욕이 가져온 결과로 서로의 전도구역 확장을 위하여 분쟁이 있었던 것이 일부의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금 기
리쑤족은 사람의 일상생활 속에도 신령이 함께 한다고 믿기 때문에 금기사항이 많다.
- 12월 27일부터 다음해 1월 9일까지의 13일 동안의 시간은 모든 사람이 외출을 삼간다.
정월 7일은 부녀의 날로써 물긷는 일과 밥짓는 일등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쉬며, 9일은 남자의 날로서 일체의 노동을 하지 않고 쉰다. 매월 보름에는 일을 하지 않고 쉬는데, 그 이유는 모든 해충이 곡식을 먹는다고 해서이다.
-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는 전 마을 사람이 고추를 먹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죽은 사람에 대해 존중하며 추모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 아이를 출산했을 경우 그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활이나 긴칼을 갖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줄 때에도 옆으로 뉘어서 안으면 안되고 곧추 세워서 안아야만 한다. 죽은 사람만 옆으로 뉘어서 들고 나가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은 후 집안의 사람들이 희거나 회색의 털을 가진 닭, 암탉, 암퇘지, 암소 등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집안의 사람이 낮에 밖에 나갔다가 해가지면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밖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밤에 들어오면 귀신을 데리고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 평상시에 야채를 씻을 때에도 물이 마구 튀도록 거칠게 씻어서는 안된다. 복이 도망한다고 생각한다.
- 손님이 왔을 때 주인은 청소를 해서는 안되며, 얼굴을 씻고 닭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을 하되 여자가 고기를 썰어서도 안되고, 문쪽에서 삶아도 안된다. 사람이 죽었을 때만 문쪽에서 고기 등을 삶기 때문이다.
- 다른 집을 방문해서는 방안에 있는 나무 궤짝 위에 앉거나 열어보거나 해서는 안된다. 주인의 허락없이 내실에 들어가서도 안되며, '훠탕(火塘)'위에 놓여있는 삼발이를 발로 건드려서는 안되고, 그 위로 건너가서도 안된다. 이들은 '훠탕'을 매우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훠탕'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주인을 모욕하는 일도 된다.
- 손님이 집에 들어갈 때 앞문으로 들어가서 곧장 뒷문으로 가면 안된다. 죽은 사람을 들고 나갈 때에만 이렇게 하기 때문이다.
- 다른 집을 방문했을 때 휘피람을 불어서는 안된다. 특히 밤에는 절대로 안된다. 휘파람을 부는 것은 귀신을 집으로 불러들인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가 질무렵 방을 드나들 때에는 꼭 문을 잘 닫아야 한다. 만약 문을 열어 놓고 있으면 귀신이 들어온다고 한다.
각 지역마다 절기를 지키는 습관도 다르고 시기도 다르다. 여기에서는 누쟝(怒江)지역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허션지에(He什節)(음력 12월 5일 - 다음해 1월 10일)
신년 바로 전 날 모든 집들이 집안과 밖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청소를 하면서 노래를 하는데, 그 내용은 모든 질병과 환난, 고통, 가난 등의 귀신을 내어쫓는 내용이다.
청소를 끝낸후에는 소나무를 문밖에 세우고 솔잎을 바닥에 깐다. 이렇게 해야만 집안의 모든 질병이 물러가고 젊음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절기의 활동으로는 활쏘기 시합과'뚜이꺼(對歌; 남녀 또는 마을과 마을이 편을 나누어 노래를 주고받으며 어떤 이야기를 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한쪽 편에서 바로 이어가지 못하면 지게 된다.)'가 있는데, 평상시에는 젊은이들의 '뚜이꺼'에 참여하지 못했던 장년들도 이런 절기를 지낼 때에는 함께 하게 된다.
따오깐지에(刀杆節)(음력 2월 8일)
'따오깐지에(刀杆節)를 리쑤족의 말로는 '아탕더(阿堂得)'라고 하는 데, 그 의미는 칼을 타고 오른다는 뜻이다.절기가 다가오면 크고 곧은 소나무를 잘라 '따오깐(刀杆; 긴 칼들을 칸날이 위로 향하도록 묶어 만든 사다리로 20m의 높이에 중간에 칼로 된 36개의 계단이 있음)'을 만든다.
경축활동이 시작되면 우선 몇 명의 용감한 청년이 '따오훠우(蹈火舞; 불 위에서 불을 밟으면서 추는 춤)를 추는데, 이때 상의를 모두 벗고 발에도 아무 것도 신지 않은채 붉게 타오르는 탄 위에서 춤을 춘다. 이 과정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다음날 '따오깐(刀杆)을 오를 자격을 얻지 못한다.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 활동을 즐기는 가운데, 전날 '따오깐'을 오를 자격을 얻은 청년이 붉은색 망토를 걸치고 '따오깐'을 오른다. 신기한 것은, 칼날을 밟고 오르고 내리는데 손과 발에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는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실제다.
'따오깐지에(刀杆節)'는 절기의 이름 그대로 이렇게 '따오깐'을 오르는 것으로 행사는 절정에 올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며 즐기는 춤마당이 벌어진다. 이렇게 위험한 활동을 하는 것은 전설에 의하면 리쑤족을 위하는 어떤 영웅이 독살을 당하자 이를 위한 보복의 행위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훠바지에(火把節)(음력 6월 24일, 25일)
'훠바지에(火把節)는 이(Yi)족, 바이(白)족 등 다른 민족들도 지키는 절기로써 각 민족마다 지니고 있는 전설이 다르다.
리쑤족이 사는 지역은 경작지가 작아 양식이 부족하고 사람도 많지 않은 반면에 돌과 들짐승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화전으로 옥수수와 감자 등을 심고, 사냥을 해서 생활을 하는데, 한 해에는 커다란 가뭄이 와서 먹을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 방법을 찾다가 한번은 새끼돼지를 따라 산 속에 들어가서 새끼돼지가 무엇을 먹으면 사람도 따라서 그것을 먹고 배를 채웠다.
가뭄의 원인은 한 귀신이 물줄기를 틀어막고 있어서였는데, 이때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이 지역에 오게 되었고, 가뭄의 원인을 아는 제갈량이 군사를 시켜서 물줄기를 막고 있는 귀신을 향해서 쏘게 했다. 귀신은 숨어있지를 못하고 나와서 항복을 했고, 제갈량이 군사를 시켜서 물줄기의 문을 열어 가뭄을 해갈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쓰촨(四川)성으로부터 벼이삭을 갖다주어 논농사도 짓도록 도와주는데, 벼이삭을 가지러간 병사가 빨리 잘 돌아올 수 있도록 리쑤족 백성들이 밤에 횃불을 들고 길을 밝혀서 환영하는데, 이 횃불로 인해 귀신과 평소에 사람들을 위협하던 맹수들도 도망을 해서 이후로는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해마다 이를 기념하는 것이 '훠바지에(火把節)'이다.
신미지에(新米節)(음력 음력 9, 10월)
'신미지에(新米節)'는 풍성한 수확을 경축하는 절기이며, 또한 오곡의 풍성을 기원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어떤 마을은 이 절기를 지낼 때 개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모든 것이 풍성해서 좋은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신이 보고 질투해서 모든 양식과 종자를 다 가져가서 먹을 것도 없고 심을 것도 없게 되었는데, 개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서 종자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이 종자를 심어서 다시 양식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 '신미지에'를 지낼 때 밥을 지어서 먼저 개에게 주고 사람들은 나중에 먹는다. 이렇게 해야만 다음의 풍년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